박선해 시인의 꽃다리 사랑 12

박선해 시인의 꽃다리 사랑 12

소하 0 1731

d17e9b4cff4c7e5fd64008d32b0935d2_1631272016_16.png

                    박선해 시인



어머니의 가방


            박선해


가방은 어머니 손에 들려지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모든 희망을 담기 시작했다


작은 오빠가 첫 월급을 드려 샀던 가방을

쓰다듬고 어루만지셨다

그러면 가방은 희미한 미소를 피워

반짝반짝 어머니의 미소로 변해갔다

두둑하게 지폐를 채우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가방은 늘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지


지금도 아마 기억하고 계실 거야

명품도 아닌데 명품처럼 들고서

어깨 당당하셨던 그때,

진짜 든든하고 듬직한 힘이 되었는데

그토록 불룩했던 사랑이 참 좋았던 거지

또 그 사랑을 무한정 담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어느 날 가방의 배가 홀쭉해진 날

어머니는 가방 속으로 들어가

수년 동안 침식을 잊고 컴컴하게 계셨지

큰 오빠의 뼛가루가 바람에 날릴 때도

가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지


수십 년이 바람처럼 지나갔어

아직도 배 꺼진 가방을 들고

시장에서 시장으로 돌아다니며

큰 오빠의 흔적을 담고 있었지

아마 가방이 사라지면

어머니도 사라질지도 몰라


그 가방이 사랑의 가방이라는 것을

늦게서야 알고

헌 가방이라고 타박했던

미안함에 다시 한번 가방이

불룩해지도록 어머니 곁에서

가방을 약칠해서 닦아본다.



그 바다, 능포

박선해
  박선해
그 바다, 능포는 뱃사람들의 삶을
하루하루 바람에 말리어
갈매기 날개깃에
어부의 노래를 실어 보낸다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 웃음 뒤로
사연은 사연이고 인생이야 인생이고
그건 그런 거야 하면서
횟거리 다듬는 여느 아낙의
회한 어린 미소가 시름이기야만 하랴
오늘은 파도의 이빨처럼 껄껄껄 소리가 난다


평생을 살아 예까지 웃고 울고
이 바다 능포에 다 버렸을 게지
사랑과 이별과 한숨과 비탄까지
능포에 남아 고스란히
묻힌 삶이 여기 다 있겠지


누가 내게 말 좀 해다오
여기 능포 바다 사람들
출렁이는 파도가 웃음이 되고
추억이 되고, 사랑이 되고
눈썹에 걸린 까딱없는 수평선이 되어
이 능포 앞바다를 말없이 지킨다는 것을




가을 연분


        박선해


천연이 물드는 한나절을 사루듯

시월의 단풍은 신명을 부른다

꽃불 피우며 외치는 낙엽들의 함성으로

사방에는 갈빛이 분출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당당한 발자취들에

술렁이는 저녁을 흠뻑 나누면

야경은 극치를 이루며 따뜻하고

향상이 있는 가을은 화두를 펼친다


단풍이 세상을 장악하고

가을 웃음이 고매하니

외로움의 향기는 더욱 고혹해지며

오가는 연분들은

황홀하게 물들어 환희로이 휘돈다


청아한 천상을 바라보며

가을로 퍼지는 그윽한 마음은

감동이 넝출거리는 물위를 걷고 있다.





삶, 그 흔적


               박선해


되돌아 올 수 없는 시간은

평상에서 장독대로 여운을 옮겨 나르고

저 먼데 깊은 산여울은

첫눈에 안개 흐르듯 그리움으로 퍼진다


아랫목 윗목은

성장 해 들고 난 세대가 되었고

평생을 바쳐 지킨 모심의 기도는

앞마당 석류 한그루에

다홍빛 미소가 되어 활짝 피었다


세월의 때 묻은 벽시계 하나

먼길 넘은 어미의 시간에 맞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식이 되어 짹깍인다


처마끝으로 보이는 건

아직 살아야 할 일들이 많음이라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은

오늘따라 내린 비처럼

다만 욕심내지 말라 한다.





구름의 등뼈


          박선해


생명의 선따라 한칸 한칸

생애를 이루던 기이한 운명들

인생의 굽이를 표시하며

뽀얀 알몸의 동토를 열었다


펴지 못한 눈꺼풀이 무겁고

가슴 한켠에 신음 한조각 안으며

철새의 등을 따라 온 겨을,

바싹한 햇살을 가른 무엇들이

열렬하지 않았을 심장에

어느 한자 쯤은

주저 앉을지도 모른다


들판의 허수아비는

목울대 세워 구름의 등뼈를 채우고

살아 있음을 건사하는 행복을 알리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중이

바람에 사위어 들면

생명의 잔재는 허물어 지지 않을

땀들로 감사히 남아

오래도록 소중한 영위로 가득할 것이다.





등대


     박선해


비록 외롭다 하더라도

굳이 쓸쓸하다 말아라


창공의 모든 고독을 다 품고

창해를 향하여 빈몸으로 섰어도

어쩌다 갈매기떼 발끝 닿으면

밀려오던 비애도 바람따라 날아 가려니


지평선으로 마안한 사연이 드나드는

끝없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지켜

무성한 순환의 소리를 담아

새벽을 가르는

바다의 점등인이 되어

무소유를 숙명으로 여며야 할 업이거늘


그로써

물질과 문명을 창출하는

역동의 무역이 교역되고

부강하는 한의 역사는 창대하리라.





하루


    박선해


눈을 떠는아침이면

뻐근한 기지개를 켜고


부지런할 용기를 다지며

돌아 보지 못한

도시를 걸으려 나선다


홀가분히 내릴

이유를 찾아

인연을 따르고


해지게 따라

일기를 엮어내는


지금의 로스팅은

내일을 위한

레시피


오늘은 선물.






항구의 저녁


        박선해


오락가락한 날씨가

불쑥 변덕스럽더니

깜짝할 사이 가을 쫒아 내고


온 몸을 동동거리면서도

추운 줄 몰랐던 그 겨울이


기류의 회전발에

철새들도 제 갈길을 찾는


낙엽은 쓸쓸하다

옷깃은 외롭다

손발은 시려웁다

추워진다고 춥다고 옴싹일때


지평선,

밤으로 가는 대지가

온심장을 붉혀 퍼지르는데

최고의 순간을 맞아

뚝 떨어는 노을 한 뭉텅이

마음 꽂힌 첫만남이

주저없는 환호성으로 존재의 꿈을 품는다


기쁨은 기쁨으로 아리고

슬픔은 슬픔으로 빛나고

세상 모든 정성을 그려 내는 항구


그 풍경을 사랑하는 밤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겨울, 장독대


       박선해


희망하는 복록이 원대하면

때로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때도 있지만


겨울 아침의 장독대는

답답한 여유로 유순한 끈기를 찾는다


독 안의 소리는

달아도 짜도 매워도 화나도

우주의 신비로움으로

꿈틀대는 물맛 소리를 내는데

더욱 진한 아가페가 숨겨져 있다


단지속에는

달빛이 녹아 흐르고

별빛으로 숙성시키며

대지의 공기를 잘게 부셔 얹어

사랑의 원관념을 꾹 눌러 농축시켜 가고


깊은 밤 장독대는

휘청이는 바람을 숨겨 먼 바다를 초청하고

날 풀린 파도에 봄소리 찰랑 촐랑 들인다


차르르 찰싹 찰차르르.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