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시인의 추천詩

시

조선의 시인의 추천詩

포랜컬쳐 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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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작가




화병

     이성자

꽃이 떠난 뒤에도
물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투명한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
가장 낮은 곳에 웅크린 채
마지막 남은 뿌리를 붙잡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물은
마른 햇빛이 유리의 목을 지날 때마다
붉은 꽃잎이었다가, 가느다란 줄기였다가
오래된 그림자처럼 물속을 떠돌았다
물이 비워진 자리에 남은 하얀 얼룩
둥글게 돌아 나간 흔적을 따라
먼지가 내려앉고
빛이 지나간 자리에 어둠이 자랐다
차가운 바닥을 훑으며
어둠에 적응해 가던 뿌리
화병 안쪽으로 푸른빛이 밀려들고
빛이 스며들던 작은 균열
투명한 몸 안쪽으로 별들이 들어앉았다
작은 물결 번지던 자리에 고인 물 위로
마른 꽃잎 하나 떠올랐다
사라지지 않은 빛을 향해
가라앉지 못한 채
꽃잎은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이성자 약력]
문예시대 등단 
시꽃피다 편집이사
포랜컬쳐 시 부문 최우수상 
감성문학 시부문 수상
첫눈에 반한 봄 수상 
구지봉문학상 본상 수상 
남명문학상 우수상 
치유문학상 최우수상



<시감상> -조선의 시인
이 시는 꽃이 시든 뒤 홀로 남겨진 
화병의 안과 밖을 비추며, 
상실 이후의 시간을 깊이 있게 응시한다. 
꽃이 떠난 자리에 남은 고인 물과 하얀 얼룩, 
먼지는 이별이 남긴 슬픔과 쓸쓸함의 흔적이다. 
하지만 시인은 슬픔에만 머물지 않고 
화병의 투명한 유리벽을 통과하는 햇빛과 푸른빛, 
밤하늘의 별을 내부로 끌어들인다. 
차가운 바닥에서 어둠에 적응하던 뿌리와 
상처 같은 균열 사이로 다시 새로운 빛이 스며들 때, 
화병은 비로소 별들을 품어 안는 하나의 투명한 우주로 확장된다. 
마지막 순간, 사라지지 않은 빛을 향해 가라앉지 않고 
떠 있는 마른 꽃잎은 슬픔의 시간을 통과한 존재가 
도달한 고요한 회복과 소생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상실의 아픔을 차가우면서도 투명한 감각으로 빚어내어, 
독자에게 서정적이고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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