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곤 시인의 시적 사유
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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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4 10:14
이형곤 시인
연옥(燃獄)에서
이형곤
제 그림자 밟고 서서
미동도 않고 밤을 새우는
요양 병원 앞 가로등,
오늘은 또
어느 서러운 영혼을 영접하고
배웅하려고 불 밝히고 섰는가
요양 병원엔 희망이란 없다
치열했던 삶의 그루터기들이
의래란 미명 아래 방치되는 곳
이며
녹슨 훈장의 투사들이
시간표 없는 간이역에서
영면 행 열차를 무작정 기다리다 황망하게 떠나가는
꿈이 없는 대합실이다
마음속 깊이 간직해 오던
첫사랑 그 사람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나처럼 늙고 병들 거라는 허무한 위안만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당직
간호사 점호 소리조차
저승사자 호명 소리 같고
병원 옆을 지나가는 기관차 진동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승의 막을 내리는 소리처럼
섬뜩하게 들려온다
초점 흐린 눈으로 내다보는
창밖 세상,
아등바등 살아온 내 삶이 저곳
이었다면 긍정도 부정도 존재
하지 않는 이곳은 어딘가
말로 만 듣던 이승과 저승 사이
연옥이 여기인가
세월의 옷소매 잡고 통곡하고
싶은 밤
인간을 만든 신이 원죄라고
삿대질 해대고 싶은 밤
본능으로만 반응하고 울부짖는 맨발의 전사들
연옥엔 눈 씻고 봐도
낭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