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현 시인의 아름다운 시절
포랜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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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9 03:41
조용현 시집(오늘도 봄날)
먼 나라에 보내는 편지
조용현
산 넘고 물을 건너 남녘 저편에 나의 고향이 있지요
그곳에 살던 꼬부랑 우리 할미는
나 어릴 적에 서둘러 먼 나라로 가셨지요
함안 조가라고 나에게 성씨를 물려준
할아비는 얼굴도 뵌 적이 없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술타령 화투장에
세월을 얹어 살던 아비는
할미보다 몇 년 더 살다 곧장 할미를 따라가셨지요
칠 남매를 낳아서 먹여 길렀어도
지지리도 복이 없던 우리 어매도 나의 나이
서른두 살 되던 해에 북망산으로 훌쩍 떠나셨지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하던데
편한 곳 찾아 나선다고 그렇게 일찍이들 가셨는가요
진작에 이리도 살기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으면
억지를 써서라도 붙들어 볼 것을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알아두었으면 길이라도 막아 버릴 걸 그랬네요
인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인지라 그 누구를 탓하리오
큰맘 먹고 찾을 적마다 부모님 없는 고향 마을은
텅 빈 가슴이었고 허망한 걸음이었네요
있을 때 잘할걸 살아계셨으면 잘해 드렸을 텐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반지르르하게 하는 말 누군들 못할까
오늘도
황금 물결이 넘실거리는 기름진 들녘을 보아하니
이리 봐도 생각이 나고
저리 보아도 눈에 아른거린단 말이네요
그 나라는 농사일이 없으니 가을걷이도 없다지요
일거리라도 있으면
이 세상 모두 핑계치고 뛰어갈 텐데
이렇게 해도 저래 해도
갈 수 없는 나라가 너무 야속하고
오늘따라 가슴이 더 먹먹해집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