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현 시인의 아름다운 시절

조용현 시인의 아름다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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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현 시집(오늘도 봄날)



먼 나라에 보내는 편지


                  조용현


산 넘고 물을 건너 남녘 저편에 나의 고향이 있지요

그곳에 살던 꼬부랑 우리 할미는

나 어릴 적에 서둘러 먼 나라로 가셨지요

함안 조가라고 나에게 성씨를 물려준

할아비는 얼굴도 뵌 적이 없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술타령 화투장에

세월을 얹어 살던 아비는

할미보다 몇 년 더 살다 곧장 할미를 따라가셨지요

칠 남매를 낳아서 먹여 길렀어도

지지리도 복이 없던 우리 어매도 나의 나이

서른두 살 되던 해에 북망산으로 훌쩍 떠나셨지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하던데

편한 곳 찾아 나선다고 그렇게 일찍이들 가셨는가요

진작에 이리도 살기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으면

억지를 써서라도 붙들어 볼 것을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알아두었으면 길이라도 막아 버릴 걸 그랬네요

인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인지라 그 누구를 탓하리오

큰맘 먹고 찾을 적마다 부모님 없는 고향 마을은

텅 빈 가슴이었고 허망한 걸음이었네요

있을 때 잘할걸 살아계셨으면 잘해 드렸을 텐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반지르르하게 하는 말 누군들 못할까

오늘도

황금 물결이 넘실거리는 기름진 들녘을 보아하니

이리 봐도 생각이 나고

저리 보아도 눈에 아른거린단 말이네요

그 나라는 농사일이 없으니 가을걷이도 없다지요

일거리라도 있으면

이 세상 모두 핑계치고 뛰어갈 텐데

이렇게 해도 저래 해도

갈 수 없는 나라가 너무 야속하고

오늘따라 가슴이 더 먹먹해집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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