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12

수필, 소설

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12

제임스 0 2945

2021 제5회 경기 한국수필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에세이] 담금질

민병식


어린 시절,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고향에는 대형 마트 대신 5일장이 있었다. 장이 열리는 날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물론, 온 동네 축제의 날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나 녹두전에 막걸리로 회포를 푸는 어르신 들, 그 맞은편에서는 대포 한 잔 내기 윷놀이가 펼쳐지고, 대장간 아저씨는 호미며 괭이며, 농기구를 잔뜩 늘어놓고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손님이 오히려 주인을 찾으러 다니던 진풍경이 벌어지던 곳이다. 그 시절 아이 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뻥튀기였는데 옥수수, 쌀, 보리 등을 가져다주고 돈을 내면 순서대로 튀겨 주시던 뻥튀기 할아버지가 계셨다. 한참 기계를 돌리다가 강냉이가 나올라치면 ''뻥이요!'' 라고 소리치던 모습, 모두 귀를 막고 옥수수 알맹이가 강냉이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절, 그 옆에서는 연탄 불 위에 설탕이 담긴 국자를 올려놓고 설탕이 다 녹으면 소다를 뿌려 부풀린 후 납작하게 눌러 원판을 만든 뒤 갖가지 모양의 철사 누르고 그 모양대로 무사히 잘라내면 백 원을 주는 뽑기, 백 원이 탐이나 온갖 조심을 다해 자르려다 결국 실패하고, 어쩌다가 용돈이 생기면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장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던 추억들이 지금도 선하다.


또, 대장간 구경이 가장 큰 묘미였는데 낫, 호미, 괭이, 쇠스랑 등의 농기구를 진열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제작 과정도 훤히 지켜볼 수 있었다. 화덕에 풀무질로 공기를 불어넣어 화력을 높인 뒤, 쇳덩이를 알맞게 달구고 뜨겁게 달궈진 시뻘건 쇳덩이를 집게로 건져 내어 모루 위에올려놓고 쇠메로 두드리고 또 불에 달구고, 두드리고를 반복한다. 뻘겋게 달구어진 쇠를 젊은 청년이 커다란 망치로 한 번 내려치면 대장장이 어르신이 작은 망치로 한 번 내려치고, 뚝딱거리며 교대로 호흡을 맞추는 장단이 여간 신이 나는 것이 아니다. 거의 완성이 될즈음 물방울이 낫이나 호미 위에서  또르르 구를 수 있게 차가운 물에 식힌다. 강도를 높이는 작업인 담금질이다. 달굼과 망치질, 담금질이 끝나면 나무 손잡이에 꽂아 넣고 겉을 둘러 테두리를 두르면 낫이나 호미가 완성이 된다. 두 사람의 뚝딱 장단은 쇳덩이를 낫으로 만들기도 하고, 호미로 만들기도 하는 등의 불의 마술을 보여준다. 대장간이 쇳덩이로 농기구를 만드는 마술을 보여준다면 뻥튀기 할아버지는 쇳덩이 기계 안에 쌀이나 옥수수를 넣고 크기가 몇 배나 되는 강냉이를 만들어 내는 마술이다. 할아버지의 손에 들어간 쌀과 옥수수, 보리가 귀한 간식이 되어 나오니 생산의 마술사임에 틀림없다. 튼튼한 농기구는 사람을 먹이고 먹을 것을 재배하도록 하는 귀한 손과 같다. 쇳덩이를 달궈지는 것을 보는 눈이나 강냉이가 튀겨 지는 것을 보는 눈이나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나를 비롯한 동네 꼬맹이 들은 장날이면 대장간 앞으로 몰려가 그 앞에서 턱을 괴고 구경을 하곤 했다. 풀무질과 화덕, 망치의 마술이 쇳덩이를 낫이나 호미로 변신시키는 과정이 한없이 신기했던 것이다. 한 번은 동무 중 한 명이 불 꽃이 옷에 붙어 태워 먹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머리에 파편을 맞은 적도 있었는데, 대장간 할아버지가 다친다고 저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셔도 우리는 쇠의 무한한 변신에 대해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담금질이 되지 않은 농기구는 무르다. 무른 쇠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구었다가 찬물 속에 넣는 담금질로 쇠의 강도를 높이는데 각 농기구의 쓰임새마다 담금질 횟수가 다르다고 한다. 바로 사람의 삶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불질과 담금질을 했을까. 풀무질로 달아오른 열기가 뜨겁게 휘감는 불 속 같은 세상에서 달궈지고 두드려짐을 거쳐 지금의 내가 있을 것인데 지금의 내가 호미이든 낫이든 괭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은 듯하다. 그냥 아무짝에 쓸모없는 쇳덩이에서 농사일에 없어서는 안 될 농기구로 탈바꿈되듯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니까 말이다.


삶은 스스로 개척하고 경험하고 성숙해지는 것, 그런 면 에서 내 삶은 대장간에서 익혀지고 두들겨지고 물에 달궈 지는 농기구를 닮았다. 지식을 쌓고 학업을 수행하고 했던 일련의 학습의 과정은 불질이고, 사회생활을 하고, 회사에 입사하고 전쟁터와도 같은 세상에서 삶의 질곡들을 헤치고 살아온 노력은 담금질이었다. 두드려 맞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면서 강해지기도 하고 다듬어지기도 하여, 세상에서 지금의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쇳덩이를 그냥 쇳덩이로만 보고 한쪽으로 치워놓고 부질없이 보낸다면 쇠는 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금방 녹이 슬 것이다. 삶은 쇳덩이를 불질하고 담금질하여 튼튼하고 멋진 농기구로 탈바꿈 하는 과정이다. 낫이면 어떻고 호미면 어떻고, 도끼이면 어떠한가. 내 삶의 주인공인 내가 스스로 대장장이가 되어 땀방울을 쏟으며 최선을 다해 삶의 과정을 만들어 냈다면 그 어떤 것이 소중하지 않을까. 어린 시절의 고향의 대장간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마음의 대장간은 늘 가슴에 남아있다. 농사에 꼭 필요한 농기구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한다. 중년이 된 현재의 나는 여전히 세상에 필요한 기구가 되기 위해 계속 담금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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