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4)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4)

방아 1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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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느티나무 사랑

 

 

수연은 화수를 보내고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했다.


"~! ! 무슨 일?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엄마는 다중언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고향 말인 전라도 사투리로, 어떤 때는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사투리로, 또 어떤 때는 표준말(엄마는 서울 표준어라고 주장하지만, 억양과 쓰는 단어가 틀리다.)로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서울 말씨는 딱히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고 서울은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니 쓸 일이 없으련만, 제법 흉내를 내는 것이 아마도 좋아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라면 밥을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갈 정도이니 필시 드라마에 빠져 살다가 배웠을 듯 싶었다.


". 엄마! , 지금 울산에 왔는데 이제 버스 타고 집에 들어가려고..."


"머라카노? 어디라꼬? 울산? 니가 와 지금 울산이가?"


".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늘 일찍 학교 일 끝내고 울산에 왔어.

저녁은 먹었으니 식사 준비는 하지 않아도 돼.

그럼, 좀 있다 봐요. 전화 끊을께요."


수연은 엄마의 말 꼬리잡기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면 수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질문세례를 퍼부을 엄마의 화제를 돌리기 위해 큰 길가 제과점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스펀지 케잌과 커스타드, 경주빵, 소보루까지 빵을 잔뜩 사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학생들의 하교 시간과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버스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빈자리가 생기고 수연은 좌석에 앉아 오늘 하루를 머릿속으로 재생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화수는 외모로만 보자면, 특출나지는 않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그리 뒤처져 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보자면 성실하게 사는 젊은이에다가 직업도 있고, 나름대로 꿈도 있는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자랑하거나 특별하게 내세울 것도 없는 보통의 남자였다.


번듯한 대기업체의 직장인도 아니고,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공무원이나 공기업체의 직원, 또는 전문적인 직업인도 아니어서 어찌 보면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경제적인 수입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대형장비 조작과 운전을 하고 있어서 만약 결혼을 전제로 정식으로 사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흠결이 더 많은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연은 이제 세 번째 만난 화수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렸고, 화수가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외동딸로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지만, 아옹다옹 다투며 의지할만한 형제자매도 없었고, 그렇다고 친구도 많지 않은 도시의 외곽에서 자라며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름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있었던 수연이 자신에게 강렬한 마음이 끌려 대시해 온 화수에게 자신도 마음이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네 곁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네게로 가는 길은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는지


너의 고백에 취해

너의 미소에 방심하다

흠뻑 젖은 스펀지가 되고 나서야

장마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네


태양을 삼켜버린 장대비에는

맨발만 담그어도

마디 하나하나가 촉수가 되어

삼투압같은 사랑을 하고


거머리같은 질긴 먹구름이

기약 없는 방황을 탓하고

맥없이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전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불편함만 흐르네


- 장마 -


버스는 작은 공단과 비어 있는 들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이윽고 수연이 내릴 정류장까지 거침없이 달려와 작은 다리를 지나자마자 멈추었고, 버스에서 내린 수연은 아니나 다를까 정류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아빠를 보았다.


필시 딸이 걱정된 엄마가 앞장서고, 엄마가 걱정된 아빠가 따라나섰을 터였다.


"집에서 쉬고 계시지 왜들 나오셨대?

두 분 딸이  태권도 유단자 서수연인데 뭐가 걱정된다고...“

 

수연은 입으로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딸 얼굴을 단 몇 분이라도 앞서 보려고 마중 나온 부모님을 생각하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아! 그래도 힘으로는 무서운 사람들을 못 당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 딸이 보고 싶어서 우째 가만 앉아서 기다리노?"


엄마가 환하게 웃었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허공을 부지런히 걷고 있는 동그란 달빛에 비친 아빠의 까만 얼굴도 오늘따라 보름달을 닮아 훤해 보였다.


수연은 그런 부모님을 보자 괜시리 미안해졌다.


평생을 무남독녀 딸 하나만을 보고 사신 분들인데, 수연 자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겠다며 그런 부모님을 떠나 타지에 나가 살고 있으면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있어서였다.


"근데 엄마 아빠보다 더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길래 우리 딸이 이 귀한 걸음을 했을까? 궁금하네."


궁금한 것은 숨기지 않고 수연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곤 했던 엄마가 역시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하려 했다.


". 그냥 친구야!"


"무슨 친구? 남자 친구가? 니 분위기가 남친같은데, 맞제?"


"남자 친구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친구!"


엄마의 촉은 정확해서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수연은 굳이 화수를 만난 것을 숨기고 싶지는 않아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은 털어놓았다.


"그래, 머하는 사람이고? 사람은 괜찮나?"


"아직 세 번 밖에 안 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좋은 사람인 건 확실해. 하는 일은 탁송기사야."


"탁송기사? 그게 머하는 긴데? 그거 운전하는 거 아이가? 운전하는 건 위험해서 안되는데..."


잔뜩 기대하며 질문을 이어가던 엄마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아빠도 걱정된다는 듯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것보다 내가 엄마 좋아하는 빵이란 빵은 모조리 다 사 왔는데 너무 많이 샀나? 이거 무겁네. 엄마가 좀 받아줘요."


수연이 슬쩍 빵이 담긴 종이 쇼핑백을 엄마에게 건네며 화제를 돌렸다.


"! 그래? 무슨 빵? 어디 함 보자..."


엄마가 쇼핑백을 받아서 속 안을 헤쳐가며 빵을 확인하는 사이, 마을 입구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달빛을 받아 푸른 빛을 반사하며 수연을 반기고 있었고, 그 느티나무의 무성한 잎사귀가 반쯤은 기와지붕을 가리고 있는 집이 보였다.


수연이 어릴 적 놀이터가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고 우산이 되어주던 친구 같은 느티나무가 여전히 버티고 서있는, 수연이 오랜만에 찾은 수연네 집이었다.



키높이 구두를 신은 너와

키재기를 하던 시절엔

철없는 시늉을 하고

사랑한다 고백했었지


바람 부는 날엔

성벽같은 사랑을 하고

비가 오는 날엔

우산같은 사랑을 했어


훌쩍 커버린 네가

내 곁을 떠나려 할 때는

울음도 나오지 않아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었어


부정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되지 않음을

지나는 바람도 구름도

모른 체하지만


함께했던 시간이 또 지나고

사랑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내 사랑도 네게 닿겠지


- 느티나무 사랑 -




1 Comments
l인디고l 2021.11.10 09:33  
ㅋㅋㅋ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