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17

수필, 소설

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17

제임스 0 210

2021 제4회 광수문학상 금상(산문) 수상작


[에세이] 둠벙
민병식

둠벙은 논이나 밭의 한쪽에 물이나는 곳을 파서 만든 웅덩이를 부르는 사투리다. 내 고향인 경기도 쪽에서는 그냥 둠벙이라 부른다. 둠벙은 땅 속에서 물이 솟거나 물이 고이는 곳에 만든다. 논에 물을 대려 만든 둠벙 이지만, 비가 오면 논 물이 넘쳐 둠벙으로 흘러 들어오는 저수의 역할도 한다. 비가 내리니 물이 들고 남이 확연하다. 이 둠벙이 가장 요긴할 때는 바로 가뭄이 들었을 때다. 논이 쩍쩍 갈라지고 작물이 말라 비틀어질 듯한 때 둠벙의 물은 농작물을 살리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다. 양수기로 퍼 올려 논에 물을 대기도 하고 밭의 경우는 급한대로 물 지게로 실어 나르기도 하는데 둠벙이 없었더라면 비가 내리지 않는 큰 가뭄에 물을 공급할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둠벙은 어린 시절의 우리 들에게는 재미있는 놀이터 이기도 했다. 그리 깊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았고 그 안에는 붕어, 메기 등 많은 물고기가 살았다. 변변한 낚싯대를 갖추지 못했던 그 시절, 대나무에 나일론 끈을 매고 추를 달고 찌를 끼워 던지면 훌륭한 낚싯대가 되었고 우리들은 붕어와 메기를 잡아 집에 가져가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마을 어른 들은 가을 수확이 끝나면 둠벙의 물을 모두 퍼서 그 속에 살고 있는 미꾸라지, 붕어, 메기를 잡아 어죽을 끓여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했는데 그 안에는 온 마을 사람 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물고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잡아도 다음 해 가을에 또 가득 물고기가 잡히니 과히 둠벙은 생태계의 화수분이라고 할 정도로 서식 환경이 좋았던 듯 하다.

둠벙은 살아있는 자연의 축소 판이다. 그곳에는 많은 생물이 살고 있었는데 물고기 뿐만 아니라 연못 식물과 수서 곤충들의 놀이터였다. 우선 터줏 대감으로는 개구리가 있었고, 물 속에는 지금은 귀해서 볼 수 없는 물 방개, 물 자라 물 위에는 엿장수라고 불리는 소금쟁이가 있었다. 엿장수는 몸에서 엿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소금쟁이의 별칭이었는데 진짜 엿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서 잡아서 냄새를 맡아본 적도 있었고, 희한하게도 진짜로 몸에서 호박 엿 냄새가 나서 말도 안되는 이름인 엿장수로 스스로 인정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부레 옥잠과 개구리 밥까지 피어나 둠벙은 곤충과 식물 들의 천혜의 보금자리였고 우리들의 자연 학습장이자 소중한 놀이터 였다. 고향 마을의 우리 집 뒷 쪽은 모두 논이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지고 둠벙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과 마트가 들어섰다.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개구리를 비롯한 소금쟁이와 그 친구들은 또 다른 둠벙을 찾아 이사를 가야했을 것인데 얼마 전 살던 아파트 부근 권역이 재개발 확정이 되자 헌 집 허물고 새 아파트 준다고 좋아하던, 공짜로 집을 주는 줄만 알았던 순진한 어르신들이분담금 마련이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살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그 사람들의 마음 같았으리라.

청소년 기에 서울로 유학을 와서도 고향 집에 갈 때 마다 꼭 둠벙이 있는 그 논 길을 걷곤 했다. 아주 좁디 좁은 논과 논 사이의 길을 헤치고 지나가면 종아리를 어루만지던 풀들의 까칠한 감촉을 느끼며 가문 논으로 흘러가던 물줄기를 따라 종이 배를 띄우고 경주를 하며 환호를 지르던 동무 들의 환한 웃음과 족대를 가지고 물고기를 잡던 기억 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 추억의 자리에는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둠벙은 없어지고, 없어진 둠벙 만큼이나 잊혀져 가는 기억과 둠벙 밖 벼 이삭처럼 노랗게 익어가는 나이가 된 중년 남의 머리 위에 희끗 희끗 서리가 내리고 그 옛날 소년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이리 저리 쉴 곳을 찾아 날아다니는 실잠자리의 날개짓이 부산스럽다.

우리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하나 삶의 질을 높인다는 핑계로 오히려 파괴하고 있는 것이 더 크다. 눈부신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주는 풍부한 물질과 편리한 생활 덕분에 마냥 즐겁고 행복하여야 하지만, 물질이 가득 차면 찰수록 욕심은 늘어나고 마음은 가난해진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잊고 늘 배고픈 사람처럼 무언가를 쫓으며 정신없이 사는 삶에게 수많은 수생 동물과 곤충, 식물이 어울려 사는 작은 둠벙이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바다처럼 넓지 않아도 강물처럼 길지 않아도 그 작은 공간의 삶은 파도가 치지 않고 재난과 홍수 피해도 없다. 채움과 비움이 일정한 삶, 만족과 감사가 어우러진 삶을 살라고 둠벙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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