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5)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5)

방아 1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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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네 번째 만남

 

 

두 번째와 세 번째 만남이 수연과 화수의 우연한 업무를 핑계로 처음 두 사람이 만난 후, 한 달하고 보름 동안에 연이어, 그것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네 번째 만남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 수연의 서울 세미나도 화수의 울산 업무지원도 1년에 두세 번 일어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어서, 때마침 발생했던 일이었는데 그런 우연한 기회는 그 후로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고속철도가 있어서 서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주말을 이용해 만날 수도 있겠지만, 화수는 화수대로 회사의 일감이 늘어나 주말에도 이틀 중 하루는 출근해야 했고, 수연은 수연대로 박사과정 진학 준비를 위해 주말이면 학교나 시립도서관을 찾아 그동안 중단되었던 전공을 공부해야 했고, 간혹 틈이 나면 울산의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했다.

 

가끔 카톡으로 서로의 궁금한 안부나 묻고 서로의 감정을 시나 글로 적어 보내주며 위안 삼았을 뿐이었고, 여느 연인들처럼 보고 싶으면 만나고, 같이 밥 먹고, 서로 손잡고 영화나 연극공연을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같이 모여서 여행을 갈 계획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다 보니, 서로 마음이 있더라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그 후 또 보름이 더 지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 반, 조급한 마음 반으로 안달이 나는 건 화수 쪽이었다.

 

회사 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화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회사에는 다른 핑계를 둘러대고, 주말을 이용해 부산으로 가겠다며 수연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러나 화수와는 달리, 화수의 카톡을 받고 어찌할까를 잠시 고민하고 망설이던 수연의 속마음은 전과 같지 않게 심경이 복잡한 상태였다.

 

화수를 만나기 전 그녀의 일상이었던, 평일에는 직업상의 학교 일로, 주말이면 또 자기 일로, 나름 바쁘게 시간을 보내던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옛말처럼 화수에 대한 마음이 바뀐 건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이 걱정하는 직업을 가진 화수에 대한 매력이 떨어졌는지,

 

그도 아니면 다른 연인들처럼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아서 이런 만남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던 기간이 수연에게 있어서는 화수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어떤 때는 수연 자신을 몹시 사랑해준다는 생각이 들어 화수 만큼은 아니어도, 수연도 화수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라는 강렬한 끌림이 있는 것도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어떤 때는 보고 싶어도 바로 달려가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해서 밤새워 통화하는 사이도 아니어서, 두 사람이 깊은 친구나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 자문해보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화수가 이따금 보내주는 카톡이 오히려 수연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했다.

 

화수의 글이나 시는 주로 수연에 대한 그의 마음을 표현해내고 있었는데, 화수와 달리 아직 확실한 감정을 스스로 정리하거나 확인하지 못한 수연은 화수의 카톡이 자신의 감정을 화수에게 빠져들게 하거나, 적어도 그의  글이나 시에 동조해야 하는 쪽으로 감정을 밀어 넣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화수가 부산에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카톡을 보냈을 때, 수연은 잠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한 번은 더 화수를 만나는 게 맞겠다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수연은 화수에게 만나자고 회신을 해주었고, 그저 수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화수는 기다렸다는 듯 주말 아침, 경부선 KTX에 몸을 실었다.

 

 

거꾸로 가는 차창 밖

멀어지는 풍경은

너를 처음 만났던 과거 속

퇴색된 흑백 사진으로 맞아주는

추억의 조각들이겠지

 

같은 길을 달린 열차는

늘 목적지가 같듯

너와 나의 생각을 연결하는 괘도가 있다면

어긋난 길 위에서 방황하는

막연한 수고는 덜 수 있을 텐데

 

난 그 길가에 네가 보고플 때마다

한 그루 달맞이꽃을 심었을 거야

별 하나 없는 까만 밤에도

네가 오는 날

환하게 웃으며

너를 밝혀줄 수 있도록

 

- 경부선 열차에서 -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그때가 날이 추웠으니 벌써 한 석 달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그동안 우리 수연이가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매번 수연이 혼자 여기 오게 하고, 그러면 안 되죠.

나는 우리 수연이가 남자친구 만나서 이제 외롭게 않게 지내겠구나 했는데...“

 

수연과 처음 달맞이길에서 만나고 저녁 요기를 때울 겸, 방문했던 포장마차의 여사장은 화수를 알아보고는, 화수를 보자마자 나무라기라도 하듯 말을 걸어왔다.

 

"아니예요. 이모!

여기는 오지 못했지만 다른 곳에서 몇 번 만났었어요."

 

"야가 머라카노? 그동안에 몇 번이 머꼬?

남자친구라 카믄,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봐야제.

그동안에 우리가 수연이 니 눈치보니라 물어보지도 몬하고, 얼매나 노심초사했는데?"

 

수연이 이모라고 부르는 포장마차 여사장은 수연과 화수에게 표준어와 사투리를 섞어서 써가며 두 사람에게 훈계하듯 했지만, 얼굴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 이모님!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수연씨도 보고, 이모님도 보고 그리고 맛있는 이모님 요리도 먹으러 자주 왔어야 했는데, 앞으로는 자주 뵐 수 있도록 할게요."

 

화수도 멋쩍어서 수연과 포장마차 여사장을 번갈아 보며 말을 받아주었다.

 

"근데, 이모님 혼자 나오신 거예요?

이모부님은 안 보이시네요?"

 

화수가 수연을 따라 포장마차 안 사장과 바깥 사장을 이모와 이모부로 친근하게 부르며 말을 이어갔다.

 

"~ 나는 밑반찬도 만들고 장사 준비하느라 먼저 점심 전부터 나오고, 우리 바깥양반은 도매시장에 가서 야채랑 음식 재료 사서, 오후에나 나와요.

근데, 지금은 점심시간이라기엔 좀 늦고, 저녁 시간은 이른 애매한 시간인데 지금은 술도 한 잔 못 하겠네."

 

"괜찮아요. 이모! 맥주 한 병하고 소주도 같이 주세요!"

 

수연이 대화에 끼어들며, 술과 함께 식사가 될만한 요리와 해산물 몇 가지를 더 주문했다.

 

늦은 오후 시간을 넘어가면서 외기 온도가 올라가고 바람은 불지 않아 약간 갈증을 느낀 두 사람은 시원한 맥주를 먼저 서로의 맥주잔에 따르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양껏 들이키고 나서 잔을 내려놓았다.

 

수연의 잔은 비어 있었다.

 

화수가 비어 있는 수연의 잔을 채우려고 손을 움직이는 순간, 수연이 먼저 맥주병을 잡아 그녀의 빈 잔을 다시 채우고는, 화수의 아직 남아있는 맥주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입으로 가져가 또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부산역에 도착해 수연에게 전화하고 만나는 장소를 이곳 포장마차로 정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온 화수는 포장마차 앞에 먼저 도착해 실내에 수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밖에서 수연을 기다렸다가 수연이 뒤이어 포장마차 앞에 도착하자 반갑게 수연을 보고 인사를 했었다.

 

그러나 블루 계열의 투피스 정장 차림을 한, 수연이 화수를 보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무언가 어정쩡하고 전과 같지 않다고 잠깐 생각했었는데, 수연이 포장마차 안에 들어와서도 별다른 말 없이 맥주를 연거푸 마시는 것을 지켜본 화수는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일까? 아니면 화수 자신에 대한 어떤 불만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수연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를 하며 조용히 수연을 바라보던 화수에게 이윽고 수연이 입을 열었다.


"주말에 푹 쉬어야 하는데 저 때문에 이렇게 멀리 찾아오게 만들어 미안해요."

 

수연이 화수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딱히 '이제부터 정식으로 사귀는 거야'라며 얘기를 하고 교제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서로의 마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만나고 있었던 것인데, 화수의 마음속으로 갑자기 휑하니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연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그 말이 있기 전에 상대방에게 어떤 미안한 일을 이미 행했거나, 아니면 이후에 미안해할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쓰는 말이었다.

 

 

하지 말아요

미안하다는 그 말

 

당신의 눈빛

당신의 몸짓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난 두려워요

 

하지 말아요

제발

미안하다는 그 말

 

- 미안하다는 그 말 -





1 Comments
l인디고l 2021.11.18 15:26  
아~~불안한 이 느낌은 뭐지~ㅠㅠ 다음회차 기대하며, 줄독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