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21)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21)

방아 1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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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섯 번째 만남, 재회

화수가 입원하고 있는 일반 병동 엘리베이터 안의 층수를 확인하고 번호를 누르는 수연의 희고 기다란 검지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민현숙과 헤어진 후, 화수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생각이 수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고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수연이 화수를 다시 만나는 것으로 결심을 한 것은 민현숙의 적극적인 부탁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는 화수가 자신과의 이별 후, 이별의 충격으로 이렇게 몇 주간 입원까지 할 정도로 사경을 헤매게 만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 그리고 그만큼 화수가 자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연민과 고마움 등의 여러 감정이 밀려들어 화수를 보지 않고 그대로 부산으로 돌아가는 경우엔 그 자신 스스로 후회하게 될 것이란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다가

이건 아니다 싶을 때도 있지

조금은

물러서 후회할 때도 있지

뒷걸음질이면 어때

다시 용기 내 나아가면 되지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괜찮은 거야

- 뒷걸음질-

수연이 눌렀던 번호의 버튼에 들어와 있던 불이 꺼지며 엘리베이터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자 수연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내려서 민현숙이 알려준 병실 호수를 찾았다.

민현숙은 수연에게 화수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까지 마치고 나서 잠시 쭈볏쭈볏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수연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며 화수를 한 번 만나줄 수 없느냐고 물었었다.

지금 화수 상태가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화수는 누나인 민현숙 자신이나 아주 친하게 지냈던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과는 일체 대화를 피하며 대인 기피증세를 보여서 의사 선생님과의 치료 상담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민현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는 가능하면 가까운 지인들이 자주 화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화수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도록 하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고 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민현숙은 그렇게 된 원인이 수연과의 이별 충격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혹시나 수연을 다시 만나게 되면 예전처럼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꼭 그렇게 되진 않아도 수연과의 대화가 화수의 치료에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부득이하게 수연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했다고 했다.

화수를 만날까 말까 주저하던 수연에게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얼굴이라도 보고 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해달라며 민현숙은 수연에게 재차 부탁했고, 주저하던 수연이 그러기로 마음을 굳히자 민현숙은 같은 건물에 있던 꽃집으로 수연을 안내해 수국과 옐로 카라, 안개꽃이 섞인 꽃다발을 사서 수연의 손에 들려주고 병실 호수를 알려주면서 자신은 아버지에게 점심을 차려주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며, '자신은 갈 테니 편하게 화수를 만나고, 가능하면 둘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화수의 심리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니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었다.

그러나 둘이서만 화수를 만난다고 해서 수연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은 민현숙이나 수연 모두 다 잘 알고 있었다.

수연이 화수의 병실을 찾아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 조심스레 들어서며 안을 살펴보니 3인실 병실 안에는 각자의 침대를 가리는 커튼이 다 걷혀 있었고, 민현숙이 알려준 대로 화수 혼자만 팔에 링겔 주사기가 꽂힌 채 누워있었다.

수연이 여전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다가갔지만 화수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고, 주사액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수연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화수에게 다가가서 침대 옆의 기다란 간이의자에 꽃다발을 살포시 내려놓고 그 옆에 조용히 앉으며 화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력을 회복했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예전에 보았던 화수의 모습과는 달리 환자복을 입은 그의 볼살이 많이 빠져있었고, 그래서인지 마치 오래 입원했던 중환자라도 된 것처럼 핼쑥해 보이기도 해서 수연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곤히 잠든 화수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면서 복잡미묘한 기분도 들었다.

민현숙의 수연에게 해준 얘기에 따르면 화수는 수연 자신에게서 그의 엄마를 연상했다고 했고, 또 이번에 수연과 이별을 겪은 후에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서 민현숙에게 맨 처음 했던 이야기도 '엄마! 미안해!'였다고 했다.

어쩌면 수연은 화수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였을 수도, 또는 엄마에게 받아보지 못한 정을 수연에게서 느끼거나 받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무의식 속에서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억누르고 있다가 우연히 분위기가 비슷한 수연을 만나 그 죄의식이 되살아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확히 화수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또 그의  진심을 들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화수가 수연을 그의 엄마와 결부시켜 생각했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건 수연이 평소 생각해 왔던 정상적인 연인 간의 사랑은 아니었다.

민현숙을 만난 뒤, 화수를 만나지 않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면 후회할 것이라며, 병원으로 화수를 찾아와 막상 바로 눈 아래로 화수를 쳐다보고는 있지만, 수연은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다시 뒤돌아,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안 한 건 아니지만, 수연은 솔직히 화수의 사랑에 관한 의심보다 그에 대한 연민이나 그리움이 훨씬 더 컸다.

수연 자신을 각별하게 생각해서 자신에게 다가와 주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신을 만나러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주고, 그가 보내준 많은 시와 글들을 읽으며 그의 생각을 같이 공감하고, 같이 있는 동안 같이 웃고 즐거워했던 기억은, 그녀를 알게 모르게 연민이나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도록 만들었다.

보고 또 보고 싶고

자꾸 생각이 나는 건

가끔은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다른 꽃을 보다가도

그 꽃이 떠오르는 건

그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네가 아끼는 일보다 더 좋고

네가 쫓았던 것보다 더 귀하고

너 자신보다 더

너의 모든 것보다 더

그 꽃이 소중하다면

그건 그 꽃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 사랑하기 때문이야 -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한참 동안 화수를 내려다보던 수연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적당한 크기의 화병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다시 병실로 들어와 거기에 적당히 물을 담고 자신이 들고 온 꽃다발을 풀어 화병에 담아 화수의 간이 사물함 위에 올려놓으려는 순간, 마치 그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주변의 인기척을 느낀 화수가 눈을 떴다.

"화수씨! 잘 잤어요?

오랜만에 화수씨 보는 건데, 이렇게 병실에서 보니 화수씨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낯서네요."

"....."

수연이 화병을 사물함 위에 올려놓고 화수가 누워있는 침대 곁의 간이의자를 당겨 앉으며, 좀 전까지의 복잡했던 심경을 뒤로하고 밝은 음성으로 막 잠에서 깨어난 화수를 쳐다보며 인사했지만,

화수는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인지, 아니면 주사약 기운 때문인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이 꿈결인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 분간이 안 되는 듯 눈만 껌뻑거리며 멍하게 수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잠에서 덜 깼나 봐요.

저 수연이에요. ..."

수연이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끊어서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 . 수연씨!

수연씨가 어떻게 여기에..."

화수가 입을 열었다.

수연은 '행여나 자신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어쩌나'하고 내심 걱정을 잔뜩 했었는데 화수가 자신을 보고 입을 열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수씨가 나 때문에, 내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데, 내가 여기에 오지 않을 방법이 없잖아요?

좀 위험한 방식이고 또다시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나를 다시 보고 싶어서 쓴 전략이라면 화수씨가 성공한 거예요. 호호."

수연이 자신도 모르게 뜬금없이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인지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화수는 웃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계속 수연을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에 힘을 주고 있어서 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수는 무언가 마음을 굳혔는지 주사기를 꽂은 왼팔을 살짝 들고, 반대쪽 오른손을 침대에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수연씨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느냐는..."

"그래요. 화수씨도 짐작하고 묻는 거겠지만, 누님이 고민하다가 화수씨 핸드폰에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내게 전화를 했었어요.

그래서 화수씨 상태를 누님에게서 전해 듣고, 이대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달려온 거예요.

여기까지 오면서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왔는데, 그래도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어요."

수연이 화수의 얼굴이 굳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조용한 음성으로 차분히 얘기했다.

그런데 수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수에게서 나온 말은 단호했다.

"맞아요. 수연씨가 보다시피 주사기를 꽂고 있기는 하지만, 난 괜찮아요.

수연씨와 이별 후에 그 충격으로 쓰러져 이 꼴이 되어있긴 하지만, 난 이렇게 멀쩡하니 내가 불쌍해서, 내가 걱정돼서 찾아 왔다면, 그만 돌아가셔도 상관없어요.

수연씨와의 이별이 아프긴 하지만, 그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버텨볼 테니 제 걱정은 마시고요."




1 Comments
l인디고l 2022.01.19 10:59  
다음회차 기대하며,,즐독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