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28

수필, 소설

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28

제임스 0 220

2022 제10회 수원화성 글짓기 대회 전국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에세이] 수원 화성에 새겨있는 효와 애민정신
민병식

격동의 시대였던 18세기, 정조의 재위기간 중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했던 신하들은 수시로 왕권을 흔들었고 백성의 궁핍한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조는 즉위 이후 노예제 폐지,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인 현륭원의 이전, 왕의 친위부대 장용영 설치 등 꾸준한 개혁의 행보를 보이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위해 애를 썼는데 이러한 개혁의 면모는 수원 화성 축조에서 절정의 모습을 보인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었고 현대에 와서 복원했다는 것 때문에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조선시대 화성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인 화성성역의궤였다. 반대하던 유네스코 위원 들은 이 정확한 기록물에 의거하여 화성을 복원했다는 사실에 결국 반대를 거두었고 결국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지정되었다. 기록물을 토대로 파손된 부분을 복원했기에 그만큼 축조된 당시의 것과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원 화성엔 4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창룡문(동), 화서문(서), 팔달문(남), 장안문(북) 4개의 문루로 이며, 정조가 처음으로 들어와서 정문이 되었다는 장안문 앞에는 바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안내판이 쓰여있다.

화성은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인 도르래의 원을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인 거중기를 이용해 축성한 우리나라 성곽 건축 기술 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하다. 정조의 여러 업적 중 가장 큰 일이 바로 수원 화성축조라고도 볼 수있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좀 더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했고 그 적당한 장소가 바로 수원이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 600칸에 달하는 행궁을 지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현릉원과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 화성을 축성하기 시작했으며, 수원성을 방비할 장용외영을 설치했다. 바로 일찍 사망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며 넋을 위로하고자 하는 효심의 발현이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여 신하들의 업신여김을 받았다고 한다. 사도세자 사후 14년 만에 즉위하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알림과 동시에 즉위하였으나 즉위 첫 해 7번의 암살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불안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임금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해마다 아버지의 묘를 찾으며 수원에 화성을 짓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화성의 완공은 물론 자신이 직접 조련한 군사의 역량도 과시하면서 정조는 수원 화성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꿈꾼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 화성에서 연다. 조선시대 22대 임금인 정조가 자신의 즉위 20주년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치룬 8일간의 축제가 바로 수원 화성에서 열린 것이다. 이 8일 간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을 여의고 아픈 삶을 살면서 바라고 바랫던 열망의 8일이기도 했다.

이 장면이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자세히 나온다. 이 의궤는 쉽게 말해서 1795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아버지 사도제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차했던 때의 기록이다. 1권에는 택일, 좌목, 도식 등의 기록이, 다음으로 본편 5권, 부편 4권 등 총 8책으로 이루어 졌다. 기존의 필사 방식을 버리고 정리자라는 동활자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며 권수, 본편, 부편 등의 편집 방식을 취하여 이후에 제작된 궁중연행 관련 의궤에 영향을 끼친 것도 아주 주목할 만하다.

정조가 아름다운 정경에 반해서 13번이나 왔다는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수원의 전경과 용연은 어떠한 경치보다도 훌륭했으며 군사지휘소였던 서장대에 오르면 정조가 쓴 현판이 걸려있다. 그 현판 만으로도 정조의 위엄이 서려있는 듯하고 그 기상이 살아있는 듯하다. 또한 수원 화성에서 진행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중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눈물에서 남편 사도세자를 먼저 보내고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인고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노론 집안의 딸로 영조의 며느리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얼마나 회한이 컸을까.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갖혀 죽은 뒤주도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를 위한 이 8일간의 축제는 자신의 지배력을 키우고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던 수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왕권의 위엄이기도 했고, 왕과 백성의 축제임을 선포한 동시에 화합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8일간 보다 출제의 8일을 더 즐거워 했을 것이다. 바로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왕권을 위협하는 지배층에 대한 경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위로,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모두 합쳐진 '위민 정신'이 생생하게 나타난 것이 축제였던 것이다. 축제는 지금까지의 조선과는 다르게 백성들이 가까이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축제가 끝나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노인 들을 위한 식사대접과 백성 들의 고충 1,200건 가량을 해결해주었다고 하니 성군의 칭송을 아니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대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임금, 언제나 백성의 편이었던 나라 사랑의 대표적 임금의 마음을 지금의 위정자들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불취무귀, 취하지 않는 사람은 돌려 보내지 않는다.' 이는 곧 백성 모두가 평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조의 다짐 아니던가.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태평성대를 꿈꾸었던 정조임금을 현대의 모든 이들이 배웠으면 한다. 코로나 19 팬더믹과 더불어 지정학적 위치의 불리함으로 늘 국제정세의 불안함 가운에 있는 우리나라는 다시 늘 마음을 바로하는 새로 고침이 필요하다. 백성이 임금의 축제에서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지금 우리가 바라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