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3)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3)

방아 0 469

899339afce2e80953d4f957c588474c6_1629841498_57.jpg

3. 그 남자

 

 

그에게 온 여자

그녀에게 온 남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이 간다는 것

눈길이 간다는 것


그대의 도도한 눈꺼풀에 이는

미세한 떨림 천천히 느껴보라

그대의 까만 눈동자에 들어온

작은 빛 하나 가두어보라

잠긴 눈에도 비로소 보이는 사람


당신의 여자

당신의 남자

 

- 그 여자, 그 남자 -


네 시.

어김없이 울리는 진동에 몸을 일으킨 화수는 알람을 끄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거실 겸 주방 앞에 놓인 테이블로 갔다.


침대에서 테이블까지는 고작 세 발자국이 채 되지 않는 세평 남짓의 작은 원룸이지만 이것저것 살림살이가 제법 보이는 건 그의 홀로살이가 제법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화수는 익숙하게 전기 포트에 정수기 물을 따르고 스위치를 눌러 물을 끓인 다음,


커피 원두 분쇄기에 원두를 담아 갈고 나서 드립용 서버 위에 일회용 드리퍼를 올리고 그 안에 적당히 분쇄된 원두를 담았다.


잠시 후 커피포트가 부르르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다 탁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꺼졌다.


화수는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커피포트를 들어 드립용 코끼리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나서, 주전자의 좁고 길다란 출구를 이용하여 드리퍼 안에 있는 원두에 골고루 젖도록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물을 붓고,


잠시 원두가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빵처럼 부풀어 오른 분쇄 원두 위에 다시 주전자 물을 골고루 돌려가며 부어주었다.


악마의 유혹이라 불리는 까맣고, 진한 갈색의 투명한 커피 방울이 몽울져서 드립 서버 안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는, 밥보다도 커피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화수가 매일 아침 치르는 경건한 드립 커피 내리기다.


매일 새벽 일어나 그의 직장이라 할 수 있는 물류센터에 가서 탁송할 차량을 배차받고, 차를 점검하고 그의 탁송 장비차 위에 옮겨 실어 고객에게 배송해주는 일은 말처럼 단순하거나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탁송 장비차를 조작하여 아래층과 위층으로 나누어진 곳에 네 대 또는 다섯 대의 신차를 조심조심 나누어 싣고, 일일이 흔들리지 않게 결박을 해서 고정하고,


각자의 차량 고객이 기다리는 곳에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시간에 연락하여 차량을 인도할 약속을 정하고, 정해진 제시간에 맞추어 차량을 배송하려면 신경을 써야 할 일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중장비와 차량을 조작해야 해서, 늘 안전사고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힘도 들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일이었다.


탁송을 해야 할 차량이 많은 날에는 더 이른 새벽에 출근해야 하거나 밤늦은 시간까지 배송을 해야 해서 늘 잠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래서 졸린 잠을 쫓기 위해서 한 모금, 두 모금씩 마시던 커피의 양이 점차 늘어나 두잔 세잔이 넘어가자 이제는 아예 그의 원룸 안에 드립용 커피 세트를 장만해서 직접 내려 마시고 있던 터였다.


화수는 내린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고 포트 안에 남아 있는 뜨거운 물을 부어 아메리카노를 만든 다음, 소쿠리에 담겨있던 바게뜨 빵을 두 손으로 잘라 입으로 베어 물었다.


화수가 아침 출근 준비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아침 식사법이었다.


커피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의식 속에 남아 있던 잠을 다 쫓아냈다.


한결 정신이 맑아진 화수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시간은  다섯 시.

그리 멀지 않은 그의 직장, 물류센터이자 차량 치장장까지는 채 이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화수는 그의 출퇴근용 경차를 주차장에 주차한 다음, 물류센터에 주차되어 있던 그의 탁송 장비 차량에 시동을 켜고 지정된 곳에 대기시키고 탁송을 해야 할 신차를 장비 차량에 실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은 다음, 사무실로 가서 배차를 받았다.


여섯 시가 거의 다 되었다.


화수는 출고지시서를 챙겨 그의 장비 차량으로 돌아와, 여섯 시 정각에 맞추어 수연에게 보내는, 어젯밤에 써놓은 알람톡을 보냈다.



수연씨! 안녕!

잘 잤어요?

어제 일백 번째 알람톡을 보내고 나니 자연스레 오늘은 수연씨에게 보내는 알람톡을 카운트하게 되네요.



무엇인가에 의미를 부여하면 더 새롭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 일백한 번째 알람톡도 그동안의 어느 알람톡보다도 더 의미 있게 느껴져요.


수연씨도 오늘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좀 더 새롭고 가치 있는 하루를 보내기 바래요.



매일 마시던 쓰디쓴 커피

오늘은 상큼한 초코렛향이 나요


커피는 쓰다는 관념에 붙들린

제 의식이 오류였음을

이 편지가 가르쳐 줬어요


나는 잘살고 있을까

이 질문이 대답 대신에

내게 끊임없는 질문을 해요


질문에 답이 따르지 않는 건

굳이 답을 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듯


우리 삶은 물음표가 너무 많지요

슬프고 화나는 일에

굳이 이유를 묻지 말아요


그대,

오늘 받게 될 크고 작은 상처가

자연스레 치유되는 하루가 되길...

 

 

이제 화수의 새로운 하루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