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ㅡ 달맞이꽃 (7)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ㅡ 달맞이꽃 (7)

방아 1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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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첫 만남



근 4시간 이상을 꼬박 걸어서 완주한 해파랑길 1코스를 자축하기 위한 만찬은 작은 광어회 한 접시와 소주 1그리고 남은 광어회까지 몽땅 털어 넣어 비벼낸 회비빔밥 한 그릇이면 족했다.


이른 시간에 허기도 채우고 속에 알코올도 들어가는 바람에 몸에서 열기가 확 차오르자화수는 아직 남아 있는 소주를 미련 없이 팽개쳐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곧 있을 해넘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화수는 부산행 열차 안에서 미리 검색해 둔 카페로 이동하기 위해서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빠른 걸음으로 달맞이고개를 향했다.


그리 심하지 않은 경사였지만 오랜 시간 걸어온 화수의 발목과 무릎이 약간 시큰거리고 장딴지가 묵직해져 오는 것을 느끼게 할 만큼 걷고 나서야 화수는 6층 높이의 한 카페 앞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카페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자리가 없어화수는 따뜻한 말차라떼를 하나 주문해서 손에 들고 곧장 밖으로 나와 붉은 노을빛이 낮은 유리 벽을 뚫고 들어 와 사방을 비추고 있는 카페의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루프탑은 생각보다는 꽤 널찍하고 확 트인 공간이었는데가운데로는 등받이가 있는 벤치들이 이십여 개가 들어서 있고 사방의 끝에는 안전용 철제 펜스와 함께 유리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이른 봄의 저녁 바닷바람이 불어와 바깥은 약간 쌀쌀했지만 루프탑에는 화수처럼 노을이 지는 석양을 보기 위해 올라온 연인들과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배낭에서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 폴라티 위로 걸치니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저녁나절의 바람으로 인한 추위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됐고손에 든 따뜻한 차는 이제 차가워진 손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때 화수의 눈에 가득 들어온 건 높다란 엘시티 빌딩 옆으로 보이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붉은 해와 노을도 아니었고 붉은 햇살이 갈매기 어깨처럼 춤을 추며 넘실대는 해운대 앞바다를 수놓고 있는 장엄한 경관도 아니었다.


한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하루의 제 일을 묵묵히 마무리하고 서산으로 지는 석양을 비스듬히 머금은 채 유리 벽에 살짝 몸을 기대어 노을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붉고 노란 노을에다 살짝 이는 바람과 함께 살랑이는 머릿결 사이사이로 황금빛이 반사되는 바람에 너무 눈이 부셔화수는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노을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화수는 머리카락이 전기에 감전된 듯이 곧추서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분명 유명 모델처럼 키가 훤칠하다거나 빼어난 몸맵시를 가진 것도 아니고 화려한 옷차림도 아니어서 특별히 눈에 확 띄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화수는 그녀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너만 보았어

황금빛 노을 속에서

그 많은 군중 속에서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훤칠하지도 않지만

내겐 네 모습만 보여


지금 넌 내 곁에 있어도

내 눈길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내 눈동자는 너만 쫓고 있어


너만 바라보며

너를 위한 시를 쓰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난 지금도 너만 보고 있어

내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너만 보여서


너만 보여서 -


화수는 잠시 머릿속이 하얘지고 멍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려고 그의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화수가 서른이 다되어 가도록 어떤 여자를 보고 이런 짜릿한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학교 캠퍼스에서 또는 친구들과 어울려 나간 미팅에서친구의 초대를 받아 가 본 축제에서멋있고 매력적인 많은 여성을 보았지만그들은 그냥 화수와는 관계없는 딴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낯선 타인으로만 느껴지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석양이 서산으로 다 넘어가고 땅거미가 서산을 까맣게 다 집어삼키도록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였고화수는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해운대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려 자리를 옮기려다가 그녀는 자신을 뚫어져라응시하던 화수를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화수는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느끼며 그를 바라보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평소 수줍음이 많고 특히여성 앞에서는 소극적이던 화수가 어디서 그런 용기를 냈는지 화수 자신도 놀라운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수원에서 온 민화수라고 합니다.

저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얼떨떨한데당신을 처음 보고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아까부터 계속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말씀을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화수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런 화수의 갑작스러운 대시에 그녀는 잠시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무슨 말을 할듯 말듯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화수에게 대답했다.


"좋아요.

보아하니 혼자 오신 듯한데 저도 혼자이고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굳이 거절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저는 저쪽으로 가서 이제 달맞이를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저랑 저쪽으로 이동하시겠어요?"


그녀는 선선히 응해주었고 화수와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서 있던 곳에서 왼쪽 해운대 앞바다 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섰다.


맑은 거울을 칼로 잘라놓은 것처럼 말간 반달이었다.


달은 훨씬 이전부터 떠있었으나두 사람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한동안 달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달빛 밝은 밤이면

달맞이꽃이 외출을 한다


해운대 백사장의 은빛 모래를 간지르고

자바라치하는 달빛을 쫓다

늘어진 해송가지에 걸터앉아 쉬는

달빛에 숨을 헐떡이며 투정도 하고


잿빛 구름이 심술부리는

바람 부는 날에는 잠 못 이루어 서러웠노라

달빛에 일러바치기도 하고

말없이 훌쩍 떠났던 달빛을 원망도 한다


달맞이꽃은 휘영청 달 밝은 밤이 지나면

다시 창백해져 가는 달빛이 보기 싫어

타들어 가는 자신의 속이 안타까워

아침이면 눈을 감아 버리곤 했다


달맞이꽃은 생의 반을 외사랑으로 살고

나머지 반은 기다림으로 산다


달맞이꽃(2) -

 

반달은 그들이 서 있는 왼편동해 바다에서 제법 높이 떠올라 수평선을 경계로 딱 그 높이만큼 바닷속에 잠겨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고그런 두 개의 반달을 서로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녀가 침묵을 깼다.


"아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전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저는..."


"호호호...  아니예요어색해서 웃어보려고 해본 말이예요.

아직 제 인사를 못 한 것 같은데저는 서수연이라고 해요.

집이 이 근처라서 이곳은 자주 오는 편인데오늘도 주말이어서 편하게 노을도 보고 달도 보려고 나왔어요.

사실 여기가 노을 구경달구경 맛집이거든요하하..."


화수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며 화수를 보고 웃어줬다.


아까보다는 많이 진정이 되긴 했지만아직도 가슴이 뜨거운 화수는 그런 자신을 굳이 숨기지 않고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얘기했다.


"그렇군요.

수연씨예쁜 이름입니다.

저는 꽃을 좋아해서 아니정확하게는 꽃이 피는 봄을 좋아해서 꽃구경하러그리고 바다 구경하러 주말을 이용해 이곳 부산에 왔고이곳 카페는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왔는데 수연씨는 이렇게 좋은 동네에 사신다니 부럽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는데그러면 제가 이긴 건가요하하..."


화수의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수연은 끼어들면서 가볍게 웃으며 농을 쳤고화수는 그런 수연이 밝고 꾸밈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아까 제가 수연씨에게 하려던 얘기는 달리 용건이 있었던 거는 아니고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경우는 제가 처음이어서...

수연씨를 처음 보는 순간에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뭐라 딱히 형언할 수 없는 이끌림, ‘이 여자를 놓치면 안돼!’라는 절박함아무튼 그런 것이 실례를 무릅쓰고 수연씨에게 대시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제야 드리는 사과의 말씀이지만 아까의 갑작스러운 결례는 미안했습니다."


"아녀요처음에는 초면의 낯선 남자의 대시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어찌 보면 기분 좋은 대시잖아요.

제게 이끌려 저만 바라보았다는데기분 나빠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좋아해야 할 일 아닌가요하하..."


수연이 기분 좋게 웃었다.


밝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쁘고 선해 보였다




1 Comments
l인디고l 2021.09.24 06:36  
소설을 읽는 동안 미소를 지으면 계속 읽었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보여 참 좋았습니다. 다음회가 기대가 됩니다.